'피카소'의 검색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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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12/15 세잔의, 세잔에 의한, 세잔을 위한 정물화 (1)
  2. 2008/12/11 천재화가 피카소의 파란만장한 여성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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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9년 남프랑스의 엑상프로방스의 한 부유한 집안에서 오늘날 ‘현대 미술의 아버지’라 불리는 폴 세잔이 탄생한다. 그는 여느 명문가 집안의 자식들과 마찬가지로 고향의 법과대학에 입학한다.

하지만 그는 곧 지루한 법학공부에 염증을 느꼈고, 친구 에밀 졸라의 권유로 파리의 아카데미 스위스로 학교를 옮겼다. 고향 친구인 에밀 졸라와 세잔의 우정은 평생을 지속된다. 한편 세잔은 파리에서 훗날 ‘인상파의 거장’으로 불리는 화가 피사로 그리고 기요맹과 인연을 맺는다.

그는 처음에 인상파전에 참여하면서 많은 영향을 받았지만, 곧 그들과 거리를 두고 자신만의 세계에 몰입한다. 세잔이 특히 관심을 가지고 있던 분야는 사물과 풍경에 대한 묘사였다. 특히 그는 ‘정물화’를 그리는 것에 몰두했다.


그러나 이러한 세잔의 작품은 처음에는 비평가들로부터 조롱거리가 된다. 사람들은 세잔을 정신병자 취급했고 결국 세잔은 1986년 파리를 떠나 낙향한다. 그런데 세잔은 정물화를 그릴 때 단순히 사물을 정교하게 캔버스 위에 옮기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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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잔이 그린 정물화


그는 수십 번 아니 수백 번이라도 구도를 바꾸면서 사물에 닺는 빛의 양을 조절했고, 심지어 모델을 놓고 초상화를 그릴 때에도 수십 번씩 포즈를 바꾸게 하는 것을 예사로 여겼다. 실제로 그의 유명한 그림 중에 ‘사과’를 그린 정물화가 많은데, 그가 그리던 사과가 썩어버리자 석고로 모형사과를 만들어서 그림을 완성했다는 일화는 그림 특히 정물화에 대한 그의 완벽주의를 엿보게 한다.

그가 그린 정물화 중에 어떤 그림은 3년에 걸쳐 완성된 작품도 있으며, 풍경화 역시 2년이 넘는 시간을 공들여 완성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근 이러한 노력을 통해 “자연은 구형 ·원통형 ·원추형에서 비롯되는 것이다”는 자신만의 미술관을 확고하게 작품 속에 담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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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세잔의 <자화상>

결국 그를 비웃던 평론가는 물론 미술에 대해 무지했던 일반인들도 세잔의 작품을 인정하게 된다. 그는 1906년 비오는 날 풍경화를 그리던 도중 벼락을 맞고 숨을 거둔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던 날에도, 병역을 기피해 추적을 당하던 도중에도. 오직 그림밖에 모르던 화가에게 어울리는 최후였다. 

그의 죽음 이후 파리에서 열린 첫 번째 회고전은 훗날 큐비즘이 태동하는 출발점이 된다. 파블로 피카소와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역시 파리에서 열린 세잔의 회고전을 받고 깊은 감명을 받았던 젊은 화가 중에 한 명이었다.

오늘날 미술사에는 이런 명언이 있다 “현대 미술에 피카소가 없으면 미술사 책의 양은 절반 이하로 줄어들 것이다. 하지만 폴 세잔이 없었다면 피카소라는 천재 화가는 탄생하지도 못했다”



2008/12/15 12:35 2008/12/15 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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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예술가 데뷔 전시회 소개(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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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의 파블로 피카소

천재의 곁에는 늘 많은 여인들의 이야기 남아있다. ‘천재화가’ 파블로 피카소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그는 약 10년 주기로 동거와 이별을 반복했다.

피카소의 첫 번째 여인은 페르낭드 올리비에였다. 피카소는 파리로 영구 이주를 결심했을 무렵 그녀를 모델로 처음 만났다. 피카소와 동갑내기(24세)였던 그녀는 유부녀였지만 곧 피카소와 걷잡을 수 없는 사랑에 빠져든다.

검붉은 머리에 육감적인 몸배를 가졌던 여인 올리비에는 늘 쾌활한 웃음으로 피카소를 기쁘게 했다. 경제적 빈곤과 우울함에 시달리던 ‘청색 시대’를 피카소는 올리비에를 통해 벗어날 수 있었다.
 
피카소는 그녀와의 동거기간동안 큐비즘을 개척했고, 걸작 ‘아비뇽의 처녀들’을 남겼다. 하지만 곧 올리비에에게 실증난 피카소는 결국 그녀를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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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별 피카소의 주요 연인들


피카소가 다음으로 만난 여인이 에바 구엘이었다. 피카소는 약 9년간에 걸친 페르낭드와의 동거를 끝내고 30세의 나이에 에바와의 동거를 시작한다. 하지만 몸이 약했던 에바는 1차세계대전이 발발한 이듬해인 1915년에 결핵으로 숨을 거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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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핵으로 숨진 피카소의 두번째 부인, 에바 구엘

피카소는 그녀와 살기 위해 스페인과 프랑스의 국경지역에 위치한 세레이 사장으로 도피한다. 하지만 에바가 결핵으로 쓰러지자 전염을 우려해 아픈 그녀를 버려두고 이사를 가는 비정한 모습을 보여 주변으로부터 비난 받기도 했다.

에바를 잃고 피카소는 러시아 발레단의 미술감독을 맡게된다. 그는 그곳에서 세 번째 연인인 발레리나 올가를 만나게 된다. 피카소는 36살의 나이에 25살의 올가의 처음으로 혼인신고를 한다.

하지만 올가가 서민적이고 편안한 삶을 즐겼던 것과 달리 피카소는 귀족적인 기질이 다분했다. 결국 두 사람은 성격차이를 극복하지 못했고, 올가는 피카소의 첫아들 파울로를 낳았지만 피카소로부터 버림받는다.

이때부터 피카소의 나이 차이를 무시한 연애행각은 점점 더 심해진다. 그는 네 번째 연인으로 열일곱 살 난 처녀 마리 테레즈 발터를 선택한다. 그녀는 피카소가 남긴 초현실주의 걸작 <거울 앞에 선 처녀>의 모델이 된다. 하지만 마리가 스물두살의 나이로 딸 마리아를 낳자 피카소는 새로운 연인을 만나기 시작한다.

그의 다섯 번째 연인은 프로 사진작인 도라 마르였다. 그녀는 조신하고 온순했던 마리와 달리 매우 이지적이고 날카로운 여인이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피카소는 생애 최대의 걸작 <게르니카>는 도라와의 동거기간에 시작해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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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의 다섯번째 부인, 도라마르


2차 대전이 끝날 무렵 피카소는 다시 40살 연하의 처녀 프랑수아즈 질로를 유혹한다. 피카소의 나이는 무려 62세였다. 그녀는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집을 나와  피카소의 작업실에 살림을 차렸다. 그녀는 피카소와의 관계에서 아들과 딸을 낳는다.

한편 이 무렵의 피카소는 공산당에 가입했다. 스페인 내전의 참혹상을 세계에 고발한 <게르니카>로 명성이 드높던 피카소는 프랑코 독재에 반대하는 의미에서 공산당에 가입한다. 아내인 프랑수와즈의 친구였던 주느비에프를 유혹한 피카소는 밀월관계를 즐긴다. 하지만 이것이 들통나자 프랑수와즈는 피카소와의 이별을 결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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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와 그의 마지막 아내 자클린 로크


프랑수와즈와 헤어진 피카소는 젊은 여인들과의 애정행각을 멈추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마지막 연인이 된 여인은 자클린 로크이었다. 그녀는 72세의 피카소를 헌신적으로 보살폈다. 덕분에 피카소는 말년에 죽는 날까지 매일 거의 한 점씩의 작품을 남길 정도로 정열적인 창작 활동을 계속 한 것으로 알려졌다.

2008/12/11 19:06 2008/12/11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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